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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남자가 모래 속에 갇혔다. 아니 그는 납치 감금됐다. 그리고 거기서 하는 일이란 하루 종일 모래를 퍼담아 올리는 강제노역이다. 그 옆에는 그 전부터 모래를 퍼 담는 일을 해온 여자가 있다. 여자는 물론 감시원이 아니다. 남자를 반겨하며 함께 일할 동료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갇힌 것도 억울한데, 이런 여자의 반쪽 역할을 해야 한다니 남자는 기가 막힐 법하겠다. 그래서 남자는 호시탐탐 모래 밖으로 나가는 계략을 꾸민다. 계략으로 꾸민다는 게 고작 꽤병부리기 ,거짓말하기, 여자 괴롭히기가 다다. 유치하고 치졸하기가 그지없다. 아무튼 그는 안해 본 게 없다. 그러다가 딱 한 번 모래 구덩이를 빠져나가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얼마 못가 잡히고 말았다. 잡히는 꼴도 우습게 되고 말았다. 모래늪에 빠져 죽기 직전인 상황이 되어 추격자들에게 살려달라 구걸하면서 잡힌 것이다. 물론 그 다음 질질 끌려 다시 처음의 그 구덩이에 버려졌음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수순이었다.

원래 그가 이 마을에 찾아온 동기는 단순한 취미 생활에서 비롯됐다. 그는 모래에서 산다는 희귀한 벌레를 잡겠다고 귀한 휴가를 내어 바닷가 오지 마을을 찾아온 학교 선생에 불과하다. 그에게 작은 욕심이 있다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모래 속 벌레를 찾아내어 이름을 떨친다는 것. 그러나 그는 묘한 음모에 빠져 들어 하루종일 끈적한 모래 속에서 살아야 하는 지옥같은 일상에 갇히고 만 것이다.

모래의 여자 - 6점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민음사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는 그에게 닥친 이 지루한 노동(모래 퍼담아 올리는 일)은 처음에는 살인 충동까지 불러올 정도로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허나 시간이 지나면서 함께 일하는 여자와 정분이 나고 여자는 임신까지 한다. 도망가겠다는 생각을 버린 것은 아니라면서 이 여자와 라디오를 사겠다는 작은 꿈도 키운다. 결국 켜켜이 쌓이는 일상이 모래만큼 무겁게 삶을 덮쳐왔던 것이다. 일하지 않으면 모래에 파묻혀 버리는 모래구덩이처럼 우리의 일상도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면 시간의 모래폭풍 속에 파묻혀 버릴 것이라는 경고일까.
아니면 본질을 잃어버린 노동의 무의미함에 대한 통렬한 경고일까. 흠, 그래 꿈보다 해몽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많은 모래들은 어디로 갔을까? 가만 보니 남자가 갇힌 그 동네는 모두가 이 모래로 먹고 사는 동네인 듯한데, 그렇게 퍼담은 모래가 어디로 갔을까? 그러고 보니 남한 땅 곳곳에서도 모래를 퍼담아 나르는 일이 한참이구나. 물론 바닷가가 아니라 강속이라는 점이 다르지만 말이다. 모래는 모래인데 이 남자나 저 청기와 밑에서 골 때리고 있을 그 남자나 삽질하는 것은 어찌 그리 똑같나 모르겠다.




사진은 본 책과 아무 관계가 없지만 굳이 관계를 찾는다면 힌트는 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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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오랫동안 국세청 구내식당에서 일해 오셨다. 주로 밥과 국을 담당하셨다고 하니, 그 오랜 기간 동안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어보지 않은 국세청 직원은 없을 것이다. 한때 국세청 구내식당이 직영으로 운영되었을 때만 해도 근무조건이나 환경은 꽤 좋은 편이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위탁업체를 선정해 계약하고 있는 지금은 그저 그렇다는 게 어머니의 생각이다. 일이 고되고 힘들다 보니 사람이 자주 바뀌고, 하루 휴가를 내더라도 눈치 봐야 하며, 아파도 아픈 걸 이야기 힘들다. 그래도 어머니는 줄곧 국세청 구내식당에서 줄곧 밥 퍼주는 아줌마로 일하고 계시다. 근 20년 가까운 세월을 그곳에서 일하고 있지만 사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작은 월급이지만 아끼고 아끼셔서 가족들이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기반을 닦으셨고, 건축 현장 일을 하시던 아버지가 이제 은퇴하시고 집에만 머물러 있는 지금도 집안의 생계를 위해 새벽 일찍 일터로 나가신다.


대한민국의 어머니들은 고단하다. 젊은 날에는 여자라는 이유로 임금 차별을 당하더니 결혼하고 아이를 임신하면서 회사에서 주는 눈치 때문에 일을 그만두거나, 보육의 어려움 때문에 회사를 떠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아이들이 커서 다시 일자리를 찾다 보면 저임금 일자리만 넘쳐난다.


올해 최저임금위원회가 결정한 내년 최저임금은 시간당 4110원. 작년에 비해 2.7%만 인상됐다. 소비자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실질임금은 낮아졌다고 볼 수 있다. 재계는 당초 오히려 최저임금을 5.8% 인하할 것을 주장하면서 “최저임금의 지나친 인상은 영세·중소 사업장의 고용률 하락과 폐업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과연 지금의 최저임금이 지나친 인상인지 의문이 들며, 최저임금의 인상이 고용률 하락과 폐업을 이어질지도 의문이다. 또 최저임금과 최저생계비간의 격차도 문제다. 4인가족의 최저생계비는 117만원인데, 최저생계비 기준이 1999년 도시근로자 가구 평균소득의 38.2%였으나, 2006년에는 31.1%까지 떨어졌다.또 근로자 가구의 중위 소득과 견줘도, 1999년에 44% 수준이었던 최저생계비가 2005년에는 36%로 낮아졌다. 빈곤저지선이라고 하는 최저 생계비가 이처럼 계속 후퇴하고 있는 것도 빈곤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과연 우리는 88만원의 최저임금으로, 4인가족의 최저생계비라는 117만원으로 한 달 동안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게 가능할까?


빈곤은 세습되고 있다. 최저임금을 받는 부모들은 빈곤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매달리게 되고,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방치되는 일이 잦아진다. 또 빈곤층이 살아야 하는 주거 환경 역시 열악해 온갖 범죄에 노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김길태가 범행을 저지른 곳도 재개발로 어수선한 치안의 사각지대였다. 가난은 온갖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을 높이고, 또 교육 여건과 질도 떨어뜨린다. 아이들은 쉽게 범죄의 대상이 되거나 가담하여 전과자 딱지를 붙인다. 그리고 저임금 노동으로 내몰리면서 헤어나기 힘든 빈곤의 늪으로 빠지는 악순환이 나타난다.



참세상 자료사진



폴리 토인비의 <거세된 희망>은 이처럼 악화되는 빈곤의 양극화와 빈곤의 악순환을 르포 작가의 체험으로 사실감 있게 보여 주었다.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넉넉한 중산층의 삶을 살면서 명성과 부를 가진 여성 칼럼니스트 폴리 토인비는 뜻하지 않는 제안을 받는다. 바로 저임금 노동자로 살아가는 체험을 하는 것. 그녀는 가난한 빈곤층 동네인 클램퍼파크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사는 가난한 50대 여성 가장으로서 빌딩 청소원, 병원 환자 운반원, 빵공장 노동자, 급식업체 종업원, 텔레마케터, 보육교사, 간병인 등의 직업을 전전한다. 대부분의 직업이 여성이 종사하며 최저임금을 받는 일들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희망이 되지 못하는 노동의 절망을 이야기했다.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을 실제 체험에서 우러나는 글로 표현했고, 이를 통해 사회 제도와 시스템을 고발했다. 그러면서도 노동 현장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수행하고 있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노고와 헌신에 경의를 표했다.


오늘날 가난을 광범위하게 정의하는 말이 있다면 바로 '제외'라는 말이리라. 평범한 즐거움에는 하나같이 '출입금지' 표지판이 대문짝만하게 걸려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소비사회는 '출입금지'를 명한다. 이보다 더한 차별정책이 또 있으랴. '제외'는 도시 풍경을 살벌하게 만들었다. 이걸 사라, 저걸 사라며 소비자를 현혹하는 번쩍번쩍 빛나는 상점은 총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돈이 모자라 가장 싼 음식을 고르는 일은 결코 즐거운 쇼핑이 될 수 없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괴로움만 더해갔다. - 383쪽


2004년 중앙생활보장위원회의 최저생계비 계측에서 ‘가족 단위 외식’은 빈곤층 삶의 질을 놓고 벌어진 첨예한 논쟁거리였다. 당시 위원회는 4인 가구 기준 최저생계비 가운데 식비 항목에 가족 단위 외식 비용은 반영하지 않았다. 아니 제외됐다. 가난은 이처럼 기본적인 가족 구성원이 누려야 할 작은 권리들을 무참히 제외시켜 버린다. 분명 대한민국의 가구당 외식 횟수가 석달 평균 2.93회를 기록했지만, 가난한 이들의 회식은 여기서 제외되고 만다.


아내와 함께 시장을 볼 때마다 평범한 두부판에 널려 있는 값싼 두부와 친환경 두부라는 글자를 큼직하게 찍어놓은 메이커(?) 두부 사이에서 항상 갈등한다. 돈이 모자라 가장 싼 음식을 고르는 일은 결코 즐거운 쇼핑이 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난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그 경계선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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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없는 지구의 차갑고 무자비한 회전.사정없는 어둠. 눈먼 개들처럼 달려가는 태양. 괴멸하는 시커먼 우주의 진공. 그리고 어딘가에는 쫓겨 다니며 숨어 있는 여우들처럼 몸을 떠는 두 짐승. 빌려온 시간과 빌려온 세계와 그것을 애달파하는 빌려온 눈. - 149쪽

남자의 손에 소년의 손이 잡혔다. 두툼한 외투와 헐어서 너덜너덜한 신발을 질질 끄는 사이로 바람은 발밑의 재를 쓸어 올리며 귀밑으로 달려들었다. 지구는 여전히 스스로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멈춘 지 오래다. 밤과 낮은 그 농도만 다를 뿐 똑같은 무채색이 지배하고 있다. 다시 기침이 시작됐다. 쉽게 멈추지 못할 때가 많다. 남자는 지도를 폈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가는 길이다. 좀 더 따뜻하고 좀 더 안전한 곳.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그는 알지 못한다. 그의 뒤로는 수많은 길들이 닫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길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는 자신이 길 위에서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가 품고 있는 불, 바로 소년이 있기 때문이다.


소년은 안다. 자신이 태어나서 줄곧 보아온 회색빛 지구. 아빠는 한때 지구가 푸른빛을 띤 아름다운 행성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아무리 상상해 보아도 푸른빛의 지구를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빠는 남쪽으로 가는 거라고 말하지만 남쪽에 무엇이 있는지, 그곳에서는 이 여정이 끝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다. 길은 우리를 남쪽으로 안내하지만 길 위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수시로 길을 버렸지만 다시 길 위에서 여정은 시작됐다.


세상의 문이 닫혔다. 남자와 소년은 닫힌 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문이 다시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머물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 준비된 삶은 길 위에 있었다. 둘은 서로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었다. 남자는 소년을 지키기 위해 살았고, 소년은 남자와 함께 있고 싶어서 살았다.


죽음 보다 못한 삶은 없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로드>에서 그려진 세계에서 삶은 끝없는 추락만이 기다리고 있는 깊은 낭떠러지처럼 보인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모욕이며 고통의 삶. 잔인한 세상에 내 던져진 남자와 아이의 모습에서 이 세상 모든 아버지와 자식의 숙명을 보았다. 한 아이의 아빠가 된 내 모습이 보였다. 잔인한 세상에서 내 아이를 지키기에 내 몸은 너무 허약하고 내가 가진 것은 볼품없다. 어린 아이에게 남은 순수한 불, 그것은 세상에 대한 희망일 수도 있고, 인간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코맥 매카시는 우리가 어린 자녀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통스러운 성찰을 강요하고 있다. 세상은 여전히 잔인하고 무서운데, 그런 세상으로부터 자녀의 눈을 가리는 것도 불가능할뿐더러 그런 자녀들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에도 우리가 가진 건 총알 없는 빈총 밖에 없다. 몸은 점점 지쳐가고 숨 쉬는 것도 힘들어진다. 당신이 가고 있는 그 길, 그 삶은 안전하지 않지만 버릴 수도 없다. 그 길의 저 끝에 있을 행복이 있을까? 아니 우리는 끝을 향해 가는 게 아니라 지금을 위해 사는 것이다. 지금 곁에 있는 작은 희망들이 올망졸망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자녀의 가슴에 있는 불을 끄지 않는 것, 그것은 스스로 자녀의 희망이 되는 것이고, 괴물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절대 저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알아. 미안하다. 내 온 마음은 너한테 있어. 늘 그랬어. 너는 가장 좋은 사람이야. 늘 그랬지. 내가 여기 없어도 나한테 얘기할 수는 있어. 너는 나한테 얘기할 수 있고 나도 너하고 이야기를 할 거야. 두고 봐.
제가 들을 수 있나요?
그래. 들을 수 있지. 네가 상상하는 말처럼 만들어야 돼. 그럼 내 말을 듣게 될 거야. 연습을 해야 돼. 포기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요.
- 315쪽



먼 훗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의 아이들에게 “온 마음은 너한테 있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 아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고 살아갈 용기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세상이 지옥 같다고 스스로 괴물이 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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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편지를 썼다. 받는 이는 장모님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편지라는 걸 마지막으로 썼던 게 언제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번에 쓴 편지에는 장모님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민서를 포함한 우리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재미있게 담아보았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장모님은 편지를 받고 무척 기뻐하셨다고 한다. 편지를 다 보자마자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각별한 말씀을 전하셨다.

……………………

편지라는 것은 형식상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담아 보내는 공간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시간부터 답장이 오는 시간까지 그 시간이 길다. 자연히 소통의 시간이 길어지고, 사색의 여백은 넓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특징으로 편지는 독특한 문학 장르로 분류된다. 다양한 서간문이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유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가 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로 선정된 이유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그람시의 문학적인 감수성과 철학과 역사에 대한 견해, 인생에 대한 자기성찰 등이 때로는 명료하게, 때로는 낭만적으로, 때로는 인간적으로 나타나 있다.

많은 독재자들은 저항하는 사상가들을 감옥에 보냈다. 그 중에 많은 이들이 감옥에서 죽거나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죽었다. 그람시의 경우도 10여년의 옥살이에서 얻은 지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부당한 권력일수록 사상가들의 생각을 가두는 방법으로 가장 손쉬운 감옥을 선택했고, 그람시 역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에 투항하지 않는 대신 감옥을 선택해 죽음을 맞이했다.

파시즘의 행태는 졸렬했다. 그람시의 생각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가두는 것뿐만 아니라 그에게 팬과 종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가 쓴 모든 편지를 검열했다. 그러기에 그는 짧은 편지 안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아야 했고, 그만큼 정제된 내용들이 편지에 담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좀더 많은 팬과 종이가 허락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사상과 철학을 전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그의 편지에서는 인간적인 고뇌도 담겨 있다. 어린 자식을 둔 아비의 심정이 절절히 담긴 편지에서는 그가 돌보지 못하는 자녀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나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늙은 어머니를 둔 자식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투항하지 않는 그로 인해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했지만 그는 사상가로서의 명예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다며 어머니를 설득하려 했다.

이탈리아 파시즘과 고독하게 맞섰던 사상가 그람시의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는 '감옥에서 보낸 편지'는 '절판'되었다. 아무래도 읽기가 수월하지 않은 여러 단점들이 이 책에는 있따. 편지글이라는 게 다분히 사적인 내용이다 보니 좀 실망스러운 부분도 있고, 그람시가 쓴 역사철학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당시의 이탈리아에 대한 역사적 지식도 필요하다 보니 책을 읽어 나가는 게 그렇게 수월하지는 않다. 물론 다양한 각주들이 친절하게 붙어 있지만 각주와 편지를 번갈아 읽어내려가는 번거로움은 술술 읽어내려가는 독서의 즐거움을 방해한다. 마치 냉온탕을 번갈아 오가는 느낌인데, 이런 독서에 길들여지지 않은 독자라면 쉽지 않은 읽기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각주를 버리고 읽어나가자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책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제 쉽게 접할 수 없는 책이 되었다. 그람시라는 인물이 현대 사상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생각할 때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지금 세계에 맑스마저도 석기시대 이야기처럼 치부되고 있으니 이상할 것도 없겠다. 허나 적어도 파시스트에 맞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사상가의 인간적인 면과 문학적인 감수성이 담겨져 있는 책 한권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어 안타깝다.


……………………

길고 긴 소통의 시간과 사색의 여백이 큰 편지가 묘한 매력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낯설고 오래된 통신수단이 되어 버린 편지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르겠지만, 당분간 지인들에게 편지를 써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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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홍어다. 얼굴 생김새도 홍어처럼 네모지다. 수컷 홍어의 생식기가 두개라는 데 노름꾼에 건달인 아버지는 이웃 동네의 유부녀와 놀아나 야반도주를 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속절없이 기다린다. 바다 깊은 곳에서 산다는 홍어를 어머니는 부엌에 매달아 놓았다. 홍어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마치 피트 하밀(Pete Hamill)의 소설 "노란 손수건"처럼 아버지에 대한 용서와 기다림을 홍어로 표시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눈이 온 세상을 뒤덮었던 어느날, 이름도 없이 거지 같이 떠돌던 여자 아이가 들어온 그날에 홍어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매질을 했다.  겨울 들판을 들짐승처럼 떠돌던 그 여자 아이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 매질을 견뎌 냈다. 어머니는 그 아이에게 삼례란 이름을 붙이고 거두었다.




어머니는 그에게 삯바느질의 주문이나 배달을 하는 바깥 일을 맡겼다. 일을 싹싹하게 잘 하는 삼례와 어머니는 죽이 잘 맞는 듯했지만, 번번이 어머니의 뜻을 어기고 어머니를 속이는 삼례에게 여지없이 어머니의 매질은 이어졌다. 그렇지만 삼례는 듣는 시늉만 할 뿐 다시 시간이 지나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삼례는 사라졌다. 삼례가 떠난 이후의 삶은 다시 기다림의 시간이다. 이제 그 기다림은 특정한 아버지로 귀결되지 않았다. 지루한 산골구석에서 누구라도 숨막힐 듯한 정적을 깨뜨릴 수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환영했다. 그러나 뒤이어 찾아온 이는 삼례의 전남편과 아버지의 정부와 그 아이, 외삼촌 등이다. 속절없는 기다림의 끝에 아버지는 나타났다.





그리고 어머니는 떠났다. 기나긴 기다림에서 어머니가 절절이 기다린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자유였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에 불을 붙인 것은 삼례였을 것이다. 전통과 가부장제에 갇혀 살고 있는 어머니는 마치 날고 싶지만 실에 묶여 날지 못하는 새와 같았다.

어머니는 기다림 속에서 참자유를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실체가 드러났을 때 정작 자신이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모든 것을 훌훌 버리고 새처럼 날아간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자유롭지 않고, 자유로운 사람은 기다리지 않는다. 어머니는 그렇게 자유를 찾아 멀리 멀리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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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이 싫다. 야근은 삶의 구체적인 계획들을 어긋나게 한다. 일을 정규 근무 시간에 마무리 짓지 못하고 밤늦게 혹은 주말까지 겹쳐서 일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자기 계발에 투여할 시간을 잡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무언가를 배우고자 해도 일주일에 1~2회 정도 주기적으로 학원에 가야하는데, 이런 시간을 잡을 수 없어 포기하는 경우가 생긴다.

쌓여 가는 야근 시간은 그만큼 스스로를 속박하고 옥죄어 주어진 일밖에 할 수 없는 기계적인 노동자로 만들 뿐이다. 창의적으로 일하고 자유분방하고 활기차게 일하는 노동자를 죽이는 제1의 공로자가 바로 야근이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OECD 국가 중에서 최장의 노동시간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많은 일을 함에도 최근 들어 실질적으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떠도는 사람이 400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100명 15명이 일자리가 불안하거나 없는 사람들이다. 근로시간을 줄이고 일자리를 나누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한 해법이 왜 안되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꽤 높은 경제 성장을 일구어냈다. 세계 유수한 나라들 중에서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이다. 경제적으로 잘 산다는 것은 단순히 잘 먹고, 좋은 옷 입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파서 병원에 가면 낮은 가격으로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적은 비용으로 누구나 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최소한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을 일이 없는 것, 그것이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 발전 정책이 내세운 목표들은 이렇게 대부분 실현되었다. 그 시대 우리 아버지들이 가난을 물리치려는 이유 중의 하나가 먹을 게 없어 굶어야 하는 일이 없고,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고, 돈 없어도 학교에 갈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 아니었나.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 세대에 대해 존경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 짧은 시간에 이만큼의 업적을 이루어낸 위대한 분들이다. 

물론 엄청난 희생이 따랐다. 후진적인 정치 문화는 지금도 그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인권 의식은 오히려 더욱 악화되고 있다. 경제 성장에 집착한 나머지 소홀하거나 의도적으로 억압했던 부분이다. 복잡한 한국 사회의 모순들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이렇듯 깊은 괴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또 1997년 외환위기 주기적으로 오는 경제 위기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최장의 노동시간을 가지고 있으며, 유래가 없는 비정규직 비율을 보이는 비정상적인 노동 시장에 대한 마땅한 해법은 없을까.

영국 게임브리지 대학 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인 장하준 교수와 국민대 경제학부 정승일 교수는 이 책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 날카롭게 후벼파고 있다. 더불어 지금의 한국 경제가 쳐한 위기를 돌아보게 하고 그 대안을 고민하는 열쇠를 던져 주고 있다.

이 책은 크게 '1부.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와 '2부. 우리는 후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로 나누었다. 1부에서는 박정희 시대의 개발 독재와 재벌의 문제를 다루면서 지금의 시장 개혁이 의미하는 바를 다루고 있다. 2부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따지고, 자본과 노동의 화해를 모색하며, 관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교정하고, 나아가 우리 사회의 대타협의 대안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 논의들은 결국 성장에 목매인 한국 사회의 의제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 사회는 과거의 그 어려운 가난에서 성공적으로 벗어났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도 깊이 들어가 보면 과거에 못지않은 고통이 상존해 있다. 비정규직을 착취하고, 이주노동자를 차별하고, 여성과 아동을 보호하지 못하고 있고, 소수자에 대한 인권 유린을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 국민소득만 높아지면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일까? 참고 견뎌서 국민소득 4만불이 되면 해결될 문제들일까? 그렇지 않다. 어느 정부든지 성장률과 국민소득에만 목메고 있고, 빈곤과 좌절, 소외, 범죄와 현실도피, 차별과 인권유린 등에 대해 대안을 내놓지 않고 사람들에게 참고 인내할 것만 강요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정부를 폐기해야 할 것이다. 삶의 질을 고민하지 않는 정부나 경제학은 암적 존재일 뿐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가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는 일이 없고, 적은 비용으로 기본적인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아프면 병원에서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듯이, 이제는 누구나 일하고 싶을 때 일할 수 있고, 일 때문에 괴롭거나 상처받지 않으며, 일을 통해 자신과 가족,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지금의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과제다.

다시 야근 문제로 돌아와 보면, 올해를 지나 내년부터 회사 업무 특성상 많은 사람들의 일거리가 없어진다. 반면 다른 분야의 직원들은 작년과 같은 살인적인 야근에 시달릴 가능성이 있다. 지금 당장 우리들 안에서부터 일자리를 나누고 함께 공생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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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나를 처음 데리고 갔던 그 새벽을 기억한다.   - <바람의 그림자> 1권 처음 시작 문구.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커다란 박스를 들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시던 어스름한 저녁을 기억한다. 그 박스 안에는 십중팔구는 책이 들어 있었다. 대부분 누가 버렸거나 헌책방에서 사가지고 오는 것이었고, 동서양 소설 전집류이거나 위인전, 백과사전류였다. 초등학생이 읽을만한 동화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작은 글씨만  빽빽하게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들이었다. 소설들은 하나같이 어렵다는 느낌이었지만, 위인전만큼은 술술 넘어갈 수 있었다. 위인전이라는 것이 대부분 청소년을 위한 책이다보니 어린 나에게도 쉽게 읽혔을 것이다. 그래도 링컨이니 워싱턴이니 헬렌켈러니 하는 책들보다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플루타르크 영웅전과 삼국지였다.

어린 나에게도 도전과 응전, 모험과 좌절, 실패와 성공, 용기와 두려움, 인내와 포용 등 인간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여러 감정들을 스팩터클한 서사 속에 그려낸 두 책은 큰 영감을 주었던 것이다. 게다가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담았던 저 책들 속에서 명멸했던가. 단순히 한 인물의 삶을 다룬 책과 비견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음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돌아보면 내 어린 시절은 저 퀘퀘하고 지저분한 헌책들과 함께 한 시절이었다. 덕분에 또래의 보통의 남자 아이들보다 많은 독서량을 보유할 수 있었고, 그 많은 독서량 덕분인지 고등학교 가서도 국어 점수는 공부를 하지 않아도 상위권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의 내 책장
쓸데없는 책들도 많다. 좀 버리자!



도서관이 하나 사라질 때, 서점 하나가 문을 닫을 때 그리고 책 한 권이 망각 속에서 길을 잃을 때, 이곳을 알고 있는 우리 수호자들은 그 책들이 이곳에 도착했는지를 확인한단다. 이곳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책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수중에 들어가길 기다리며 영원히 살고 있지. 가게에서 우리는 책들을 사고 팔지만 사실 책들은 주인이 없는 거란다. 여기서 네가 보는 한 권 한 권의 책이 누군가에겐 가장 좋은 친구였었지. - <바람의 그림자> 1권 14쪽

돌아보면 정말 책이 많았다. 그 많은 책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집안 사정으로 인해 숱하게 많은 이사를 다니면서 책은 사라져갔다. 어쩌면 '잊혀진 책들의 묘지' 어느 한 구석에 내가 읽었던 플루타르크 영웅전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지 않을까.

소설 <바람의 그림자>는 어느날 신비한 책을 발견한 다니엘이 그 책에 얽힌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면서 진실한 사랑에 눈을 뜬다는 조금은 통속적인 소설이다. 그러나 글의 전반적인 구성과 짜임은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을만큼 촘촘하고 등장인물들의 개성이 가득한 묘사와 사건 사고들의 치밀한 짜임은 이 책을 쉽게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든다.

지금의 내 삶은 먼저 죽어간 사람들이 간절히 살길 원했던 내일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의 내 삶은 먼저 죽은 사람들의 희생 속에서 만들어진 미래라는 말이다. 훌리안의 아픈 사랑과 비통함은 다니엘과 베아의 사랑을 통해 보상 받는다. 다니엘은 훌리안의 비극적이고 공포스러운 과거를 알아가면서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랑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인생에서 진정한 사랑은 단 한 번 있는 거다, 훌리안. 비록 그걸 깨닫지 못한다고 해도 말야. - <바람의 그림자> 2권 269쪽

우리는 지금 어떤 책을 보고 있을까.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사람을 만들고 있을까. 쏟아져 나오는 책들은 과연 10년 뒤 20년 뒤에도 나의 책장 속에서 의미있게 살아 숨쉬고 있을 수 있을까. 2~3년이 지나 "괜히 읽었어. 괜히 샀어. 괜히 가지고 있었어."라며 우스개 소리를 하지는 않을까.

책을 통해 우리는 그 책을 쓴 사람을 만난다. 책에는 글을 쓴 사람과 그 책을 만든 사람의 영혼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해 그 책이 나오는 과정에서 숨결을 불어넣은 영혼들과 만난다. 진정한 책읽기는 종이 위에 쓰인 글자들을
숙지하는 것이 아닌 그 책을 만드는 데 숨결을 불어넣은 영혼들의 읽어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네가 보는 책들, 한 권 한 권이 모두 영혼을 가지고 있어. 그것을 쓴 사람의 영혼과 그것을 읽고 살면서 꿈꾸었던 이들의 영혼 말이야. 한 권의 책이 새 주인의 손에 들어갈 때마다, 누군가가 책의 페이지들로 시선을 미끄러뜨릴 때마다, 그 영혼은 자라고 강인해진단다. 이곳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책들, 시간 속에서 길을 잃은 책들이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수중에 들어가길 기다리며 영원히 살고 있지. - <바람의 그림자> 1권 13쪽.


인생이 심심한 사람들, 판타지와 사실의 경계가 그리운 사람들, 진정한 사랑에 의문을 품고 있거나 사랑을 찾아 방황하는 이들, 책을 읽을 때마다 뒤에 귀신이 서 있는 느낌이 드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바람의 그림자 1 - 8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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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졸업할 때만 해도 그런 말은 없었다. 학점이 좀 부족해도 자기소개서와 면접에서 점수를 딸 수 있다는 황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살던 때였다. 그런데 사정이 달라졌다.


“스펙이 딸려서.”
“스펙을 키워야 해요.”
“거기는 어느 정도 스펙이 되어야 해요.”


스펙 때문에 대학에 대학원까지 졸업하고도 다시 학원을 쫓아다니고도, 토익 토플 시험 보러 다니고, 영어 외에 2개 외국어를 배우느라 머리 터지게 싸우고 있다. 스펙의 내용을 보면 딱히 자기개발과는 다른 내용들이다. 대부분 기업과 사회가 요구하는 추상적인 내용의 구체화에 불과하다. 학원들만 신이 났다. 불과 10여년 차이 밖에 나지 않는 그들과 나의 괴리는 세대차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큰 간격을 가지고 있다.


지금의 20대에게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이 이렇게 대단한 거였을까? 그들은 적어도 이전 세대에 비해 사회가 요구하는 자질(?)과 능력(?)에 구체적으로 반응하고 직접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세대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실업의 수치는 왜 이렇게 높은 것일까? 왜 그들은 자꾸 졸업을 늦추고, 휴학을 필수로 선택하고, 해외로 어학연수를 떠나면서도 취업 준비로 수개월 심지어 1~2년을 보내는 것일까. 물론 자살 같은 극단적인 경우는 언급하지 않겠다. (20대 자살율 또한 만만치 않게 높다.)


이렇게 스펙을 쌓아온 이들의 연봉은 어떨까? 10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우리 경제 규모만큼 늘었을까?


지금의 20대는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며, 곧 비정규직이 될 운명 앞에 서 있다. 8백만 명을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평균은 119만원이며, 전체 임금에서 20대가 평균적으로 받는 비율을 적용하면 88만원이 된다. 그나마도 세전 금액이다. 따라서 하루 8시간을 일하는 20대 비정규직이 한 달에 확보할 수 있는 경제력은 그보다 적다. - <88만원 세대> 197쪽


여성의 첫 출산이 늦어지는 이유 중에는 늦어지는 결혼이 있고, 늦어지는 결혼에는 늦은 취업활동이 있고, 늦은 취업활동에는 늦은 대학졸업과 늦은 독립이 자리 잡고 있다. 평균 학력이 계속 높아지고 있으니 그만큼 대학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도 많아졌고, 휴학이라도 해서 어학연수라도 다녀와야 그나마 평균치에 가까워지고 있는 현실, 대학 등록금 1천만원 시대를 살다 보니 대학 졸업하자마자 빚더미에서 시작해야 하는 현실, 빵빵한 스펙에도 불구하고 88만원의 비정규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해야 하는데 그것도 언제 짤릴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살아야 하는 현실을 살고 있는 게 지금의 젊은 세대가 처한 상황이다.


미래 세대의 불행을 저당 잡아 기성세대가 부를 쌓는다면, 실패와 좌절의 공포 속에서 보내야 하는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이 사회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국가라는 존재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얼토당토 않는 사업을 벌여 대규모 재정 적자를 일삼아 미래세대가 갚아야 할 부채를 더욱 부풀리고 있다.


단지 10여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 주위에서는 ‘요즘 젊은 것들’이라며 혀를 차는 사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젊기 때문에 서툴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으며, 버릇없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함께 일을 추진하고 함께 배우며 가르치는 과정보다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생각부터 한다. 언젠가 당신도 그 위의 누군가에 의해 쉽게 갈아낄 수 있는 배터리가 될 수 있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 생각은 그렇게 얄팍하고 가볍다.























지금의 20대에게도 말하고 싶다. 승자독식 개별경쟁을 요구하는 사회에 맞서야 한다. 스펙이 아닌 자기개발에 뛰어들어야 하고, 20대를 옥죄고 있는 사회 제도와 차별에 싸워야 한다. 지금의 20대의 고통은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됐다.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가난과 빈곤의 문제로 부의 재분배, 복지와 인권이 보장되는 국가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적인 문제에 좀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올바른 정치적 선택과 책임을 고민해 보아야 한다. 경쟁의 관계가 아닌 협업과 연대의 관계를 지향해야 한다. 기업이나 더러운 정치인들에게 생각없는 소비 대상이자 없어서 좋은 표 한장으로 인식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뒤집어야 한다. 당신들은  경제에서 생산과 소비의 주체이며, 정당한 투표 권력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지금의 문제 해결에 적합한 정치 세력을 정책 결정권자로 내세울 수 있는 파워가 있고, 그런 정치적 선택 과정에서 스스로 세상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권리에서 낮잠 자지 마라. 아무도 당신들의 권리를 챙겨주지 않는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 씨가 책에서 말했듯이, 당신들만의 ‘바리케이트와 짱돌’이 필요하다.



88만원 세대 - 8점
우석훈.박권일 지음/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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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하세요?”

상대방을 알고자 할 때 가장 쉽게 던지는 말이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이 그 사람을 말해 준다는 오래된 관념이 투영되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때로는 편견을 담는 말이다.

“편집자에요. 책 만드는 일을 하죠.”


내 설명은 그것으로 끝이다. 그럼 상대방은 여러 가지 상상을 할 것이다. 상대방의 지인 중에 편집자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좀 절망스럽다. 세상의 모든 작가들이 어떻게 편집자를 묘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작가가 받는 스트레스의 근원은 보통 편집자 혹은 편집장의 마감 독촉이다. 마감 독촉을 하는 편집자의 모습을 작가들은 사악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마감 원고를 받기 위해서는 옆에서 밤새도록 방문앞을 지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독종들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천사의 게임>에 나오는 코렐리라는 편집자는 작가의 영혼마저 담보로 잡고 있지 않나.


사실 편집자야 말로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예전 교과서 편집자들에게 오가는 속설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편집자가 교과서에 나오면 그 책은 심사에서 떨어진다.’ 물론 지금은 편집자의 이름도 버젓이 박혀서 교과서가 나오고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편집자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다.


한 권의 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기획, 집필, 디자인, 조판, 교정, 제판, 인쇄, 제본 등등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작 자기가 만드는 책이 어떤 책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저자도 아니고 바로 편집자다. 편집자는 저 모든 과정에 개입해서 일일이 조정하고 합의하며 때로는 피터지게 싸우면서 한권의 책을 독자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훌륭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위해서 지휘자가 필요하고, 대중을 사로잡는 영화를 만들려면 뛰어난 영화감독이 필요하듯이, 역사에 길이 남을 책이 세상에 나오는 데는 편집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책 <편집자란 무엇인가>는 편집자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편집자, 저자, 북디자이너, 인쇄공-이라면 반드시 읽어볼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과 과정이 필요하며, 어느 과정에서는 무엇에 세심하고 이런저런 치명적인 실수에 유의해야 하는지 일목요연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이 나에게 준 감명은 사명감과 자부심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출판사 가운데 하나인 사이먼 앤드 슈스터사에서 41년 동안 편집자로 일한 집시 다 실바는 기고문 <편집자와 저자>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편집자는 대부분 알려지지 않는다. 우리는 글, 창조적 아이디어, 책을 사랑하기에 이 일에 매진할 뿐, 우리가 주목받길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공헌을 깊게 이해한 저자가 머리말이나 감사의 글에서 우리의 이름을 언급하고자 하면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허락할 뿐이다. 우리는 편집자라는 직업이 최선의 책을 위해 묵묵히, 무명으로 공헌하는 직업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우리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사폰이 그의 책 <바람의 그림자>에서 이야기했듯이, 모든 책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믿는다. 한 권의 책은 수많은 밤을 새우면서 글자 하나하나 눈에 박아 넣었을 편집자들의 피와 땀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혼이 더욱 깊어질수록 이 세상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올해로 책 만드는 일을 한지 횟수로 10년을 채웠다. 그동안 내 손을 거쳐간 책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이땅 어디에서 누군가에게 읽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이 그 책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편집자라는 직업을 결코 버릴 수 없는 매력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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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지금이 집을 살 마지막 기회일까?


어제(12일) PD수첩의 제목은 ‘2010년 부동산 경제, 아파트의 그늘’이었다. 확실히 부동산, 특히 아파트 경기는 죽어가고 있다. 단순히 겨울철이라는 계절적 요인만 있는 건 아니다. 연일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부동산은 이미 거품이 잔뜩 끼어 있었던 터라 결코 다시 뛰지는 못할 것이다. 이렇게 미분양이 속출하고 분양가 이하에 나온 매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이 내집 마련 절호의 찬스라고 부추기는 언론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정말 지금이 집을 살 마지막 기회일까?’ 여기에 대해 이 책 <위험한 경제학>은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선대인 씨가 쓴 '위험한 경제학'은 집을 사기 전에 사실 관계부터 바로 보자고 한다.


언론에 나온 보도와 다른 실제 부동산 경기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라는 것이다. 저자는 최근의 아파트 가격의 흐름을 보여주고,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실거래가’라는 것은 실상 ‘호가’에 불과하며 거래량이 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실제 최고점이었던 2006년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즉 거래량이 극히 떨어져 있는 상태-부동산 침체는 지속되고 있다.


저자는 그래서 ‘부동산 시장, 큰 그림을 보라’고 충고한다.


대부분 부동산이라는 아이템에 눈이 멀어 한국의 거시 경제의 흐름, 세계 경제의 흐름을 놓치고 있다. 한국은 인구 감소 시대, 저성장 시대로 이행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흐름이 2010년대부터 본격화할 전망이다. 지금 잔뜩 껴 있는 거품이 꺼져야 정상적인 부동산 거래 시장이 확보될 수 있다. 아직 거품이 꺼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이명박 정부의 비정상적인 부동산 정책에 기대어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라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현재 투기성 주택 시장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강남 재건축 집값 역시 재급락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PD수첩에서도 제시되었지만 강남아파트를 가지고 있는 많은 이들이 엄청난 은행빚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은행빚에 따른 이자지급액만큼 아파트 값이 올라주지 않는다면, 결국 꾸준히 자산 가치를 까먹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부동산, 막차에 올라타지 말라’고 강조한다. 저자가 제시한 사례 하나를 보면 집에 대한 허망한 꿈을 접을 수 있지 않을까?


“A라는 사람이 자기 돈 3억 원과 은행에서 빌린 돈 2억 원으로 5억 원짜리 집을 샀다. 물가 상승률이 4%, 은행 대출 이율이 6%라고 할 때 A가 3년 후 각종 기회비용을 만회하고도 차익을 얻을 수 있는 집값은 얼마나 될까? 물가 상승률을 감안할 때 A의 자기 돈 3억 원이 같은 가치를 유지하려면 3억 3750만 원이 돼야 한다. 또한 대출액 2억 원의 연간 이자는 1200만원이므로 3년간 이자는 3600만 원이다. 이 두 가지만 해도 7350만원이다. 이 밖에 부동산 거래에 따르는 취등록세와 재산세, 부동산 중개 수수료, 이사 비용 등을 감안한다면 각종 기회비용은 1억 원에 육박한다. 이는 현재 5억 원짜리 집이 3년 후 6억 원으로 올라야 겨우 본전이라는 뜻이다. 현재 집값 수준에 비해 20%가량 오르는 것을 의미하는데, 현재 주택 시장의 사정상 20%가량 오를 수 있을까?”


연일 뉴스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미분양 사태’. 이 사태는 얼마나 갈까? 저자는 ‘미분양 물양 해소에 최소 4~5년 걸린다’고 한다. 1995년 공식적으로 15만여 호를 넘어선 미분양 물량이 해소되는 데에 최소한 4~5년이 걸렸으며, 지금 16만호가 넘는 미분양 물량이 해소되는 데에는 경기 흐름이나 사회 흐름을 봤을 때 더 걸리면 더 걸렸지 결코 짧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요새 ‘집 장만하려면 대출은 기본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빚 없이 사는 게 행복’이라는 말처럼 대출과 빚이 일반 서민들에게도 일상적인 말처럼 다가오고 있다. 온갖 매체에서 수시로 돈을 빌려주겠다는 광고가 판을 치는 세상이니 빚이 없이 사는 게 행복이라는 말도 결코 우습지 않게 들리는 것이다.


저자가 밝힌 또 하나의 진실은 언론과 건설업자의 유착관계다. 지금 당장 TV를 켜보자. 아마 지상파 방송의 광고 중 아파트 광고가 얼마나 되는가 찬찬히 살펴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비싼 광고인 TV광고가 이정도인데, 광고에 수익을 의지하는 신문들의 이해관계는 얼마나 될지는 어린애들도 짐작할 수 있다. 이러다 보니 언론을 통해 ‘아파트 가격부터 조작되고 있다’. 언론에 오르내리는 아파트 가격은 실거래가가 아닌 호가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 역시 아파트 부녀회를 거쳐 만들어진 가격일 뿐이라는 것이다. 언론은 이를 알면서도 팩트라며 아파트 가격을 올리고 있다. 왜냐하면 아파트가 죽으면 광고가 죽는 것이고, 광고가 죽으면 언론 특히 거대 신문사들이 막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정부 인사에서 드러나듯이 해당 언론사 임원들의 부동산 투기 이력도 만만치 않을 것이며, 부동산에 이해관계가 있는 만큼 부동산 가격을 부추기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다 보니 사실보도는 버려진지 오래고, 기자 정신은 찾아볼 수 없으며, 사주의 딸랑이들로 전락한 조중동 기자들이 아파트 투기를 부추기는 신문 기사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줄기차게 “집을 사라”고 주문하는 신문들의 기사를 아직도 신뢰하고 있다면 당신은 바보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다보면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다르다”, “우리나라는 일본(혹은 미국)과 다르다. 집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우리 지역은 다른 지역과 다르다” 등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심리적 기저에 대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심리 역시 경제 흐름에 의해 흔들리는 면이 크다. 또 심리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생성되었는지 잘 살펴보면 그 역시 언론에 의해 생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만큼 언론에 의해 조작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심리’를 말하는 것 역시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는 말을 퍼뜨리려는 거대 신문사들의 주장에서 비롯되었으며 합당한 논리를 찾아볼 수 없는 꾸며낸 거짓일 뿐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불행은 이명박 정부로 귀결된다. 이러한 사태의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을 방관, 아니 오히려 악화시키고 있는 지금의 정부를 보고 있으면 절망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내집에서 살고 싶은 소박한 꿈을 '부동산 재테크'로 바꾸었던 우리의 탐욕에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닐까? 집을 ‘사는 곳’이 아닌 ‘사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의 욕심이 부른 화가 아닐까?



** 본문에서 볼드(굵은 글씨)로 처리된 부분은 책의 제목에서 따온 것입니다.



위험한 경제학 - 8점
선대인 지음/더난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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