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TX여승무원 승소 소식을 접하고서...


처음에 그들은 그야말로 빛나는 존재였다. 지상의 스튜어디스라는 찬사도 들었다. 입사도 쉽지 않았다. 적게는 13대 1, 많게는 135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했다. 시속 300km의 거침없는 속도처럼 내달릴 인생을 꿈꾸었을 것이다. KTX 홍보 광고에도 단연 돋보였다. 그들을 선발할 때 철도공사 임원이 배석하여 키와 용모, 나이 등을 따져가면서 사람들을 선발했다. 선발된 이후에도 교육과 업무 지시, 감독 및 평가, 대외 홍보활동에까지 많은 부분에서 실질적으로 철도공사의 직원과 다름없이 활동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철도공사 직원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외주와 도급을 거쳐 그들은 비정규 계약직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그들은 거리로 나섰고 언론은 키 크고 예쁜 젊은 여성들의 거리 집회에 반짝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지난 27일 서울중앙지법은 이들이 사실상 한국철도공사(KTX)의 실질적인 정규직 근로자이며 철도공사는 이들에게 밀린 임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 관련 기사 : “해고된 KTX 승무원들, 철도공사 근로자”






다시 시간을 돌려 2006년으로 가보자. 국가인권위원회는 2006년 2월에 KTX여승무원 관련 진정 2건을 받고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여성에 대한 고용차별이라는, 아직은 우리 사회에 생소한 사안에 대한 조사는 쉽지 않았다. 처음 사건을 배당받았던 조사관은 월간 <인권>(2006년 11월호)에 이렇게 밝혔다.


“처음 사건을 배당받고 든 암담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장 본질적인 비정규직 문제임에 분명하지만 법망에 걸리지 않는 간접고용 사건인 것이다. 직접고용 비정규직이던 새마을호 여승무원들은 성차별을 주장해 정규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KTX 여승무원들은 그토록 열심히 싸웠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다.”                             >> 관련 기사 가기


지난한 과정 끝에 국가인권위원회는 2006년 9월 KTX 여승무원에 대해 성별을 이유로 하는 고용 차별이라며 한국철도공사에 시정을 권고했다. 그러나 권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관련 보도자료 가기


국가인권위원회가 지적한 차별의 내용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고용 차별이 어떤 편견에서 비롯됐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4년이 지난 현실에서도 다르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먼저, 채용 과정에서의 성차별 문제다. KTX여승무원 채용 과정에서 한국철도공사는 ‘서비스 업무에 적합한 용모의 여성’을 채용 조건으로 내세웠고, 신입직원의 경우 21세부터 25세까지로 나이를 제한하였으며, 162cm 이상을 신장 기준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철도공사는 업무에 있어 신장과 나이의 제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어떠한 논리나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남성 중심 사회의 차별적이고 일방적인 시선만이 존재했다. 게다가 이는 남녀고용평등법 제7조 제1항 및 제2항의 규정(용모, 키 체중 등의 신체적 조건을 채용기준으로 제시하거나 요구하는 것을 금지)을 위반한 것이다.


다음은 ‘성차별에 근거한 분리 채용’의 내용이다. KTX승무원의 역할은 방송 시스템 취급, 승강문 취급 및 이례적인 사항 발생 시 조치 등 본질적인 업무 대부분을 수행하는데, 이 중 고객서비스 업무만을 단순 반복적인 업무로 보아 여성 승무원에게 전담시킴으로서 저임금과 고용 차별을 정당화했다.


이 문제는 여성의 일을 평가절하 하는 성차별적 편견에서 비롯됐다. 현대 사회는 여성을 사회적 노동 시장에 끌어들이면서도 여성의 노동을 공짜로 제공되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보았다. 누군가를 보살피고(고객서비스, 돌봄, 간병 등), 청소하고, 요리하는 일에 대해 저평가하여 저임금을 지급하고, 외주나 도급화 등을 통해 차별하는 사례는 지금도 흔하게 볼 수 있다. KTX여승무원 사례는 승무원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업무를 모두 배제시키고 그중 돌봄의 영역(고객서비스)으로 축소하여 저임금 계약직으로 비정규직화 해 차별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철도공사가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고 이들에 대한 차별적 고용을 시정하는 한편, 오랜 세월 우리 사회의 차별에 가슴 아파했을 KTX여승무원들을 보듬어 안아야 할 것이다.





위 글은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을 재수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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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다.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고 태양은 나를 향해 비추며, 바람마저 내 귀밑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겨준다. 새들의 노랫소리도 나를 축복하고 꽃들도 내 아름다움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그런 날들. 내 사랑과 열정이 넘쳐나던 젊은 날을 떠올릴 수 있고, 동네 골목길을 뛰어다니거나 산골짜기를 오르내리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는 이도 있겠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전직 군인이었던 한 여성은 구금자들 앞에서 찍은 사진을 내 보이며 “내 삶의 최고의 날”이라고 했다. 그이에게는 군대에 있던 젊은 날이 국가를 위해 헌신과 봉사를 하며 내적, 외적 아름다움을 이루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그에게는 자랑스러운 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관련 기사: 이스라엘 여군 “내 최고의 날” 페이스북 사진 인권침해 논란



그러나 아름다운 삶은 지금 있는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그 사진은 인간이 지금까지 쌓아온 정신적 문명이 망가지는 장면을 담은 것일 뿐이다. 눈이 가려지고 손목이 묶인 수감자들의 심정을 생각하지 않은 것, 타인의 고통과 수치심, 절망감에 대해서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을 그저 사진 속 배경에 처리해 버린 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린 것이다.


윌리엄 아서 워드는 “언젠가 우리는 모두 생활(수준)의 기준이 아니라 삶의 기준으로, 부(가진 것)의 척도가 아니라 나눔의 척도로, 표면적인 위대함이 아니라 내면적인 선함으로 평가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개개인마다 생각하는 최고의 날로 다시 돌아가 보자. 과연 그 최고의 날은 생활수준의 기준으로 잡았던 것일까? 부의 척도로 재단했던 것일까? 아니다, 내면적인 선함, 인간성의 순수함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다가오는 8월 22일은 역사적인 제네바 협약이 맺어진 날이었다. 1864년 8월 22일 제네바에서는 전쟁에서 군대 부상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협약을 맺는 것으로 출발해 지금은 전시에서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조항까지 전쟁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인류의 약속으로 자리매김했다. 제네바 협약의 정신은 치열한 전쟁 상황에서도 야만적인 상황을 멈추게 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여성이 놓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 사진은 ‘내 삶의 최고의 날’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누구에게 분명 ‘내 삶의 최악의 날’이 되는 사진이다. 우리 스스로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배울 수 없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립과 갈등의 배경이 저 사진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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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owls0115: @saunakim 말씀대로 진실은 밝혀지겠죠. 하지만 언론통제와 표현의 자유 침해는 지금 이명박 정부 하에서 우리나라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금의 심각한 기본권 침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saunakim: @eowls0115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말씀 하시는 건지요?


이전부터 김철균 비서관을 팔로잉 하면서 그가 소통하려는 노력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고 있었다. 또 그의 이런 노력이 진심이라는 것도 느껴졌다. 그럼에도 오늘은 한마디 안할 수가 없었다. 김 비서관 말대로 PD수첩의 불방과 청와대 사이에 아무 연관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며 나 역시 그렇게 믿고 싶다. 하지만 사람들의 오해는 하루 이틀 쌓인 것이 아니다.



이전부터 언론통제와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는 지적된 사안들이 너무나도 많다. 내 질문이 좀 도발적인 면도 있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마치 그런 일은 없다는 듯이 반문하는 건 아니다. 약간은 흥분해서 요새 말하는 폭풍 트윗을 좀 했다. 다음은 이후의 내 트윗이다. 비서관에게 맨션으로 날리지는 않았다.


1. 국제앰네스티는 2010연례보고서에서 “한국 사회는 지난 1년간 인터넷과 집회·시위 등에서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는 사건이 다수 발생했다.”면서 미네르바 사건과 PD수첩 기소 사건 등을 소개했다.

2. 국제엠네스티는 “미네르바 사건 이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많아지고 정부의 무리한 기소가 늘었다.”면서 “과도한 불법화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3. 그 외에 용산참사나 천안함 사태에 대한 의견 표현은 매번 경찰과 검찰에 의해 협박당하거나 위협당하거나 체포 연행 기소 등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다.

4. 지난번 6.2 지방선거는 세계 선거사에서 웃음거리가 될 만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4대강 사업에 대한 비판이나 친환경 무상급식 홍보가 선거법 위반이라고 한 것은 기가 찰뿐이다.

5. 게다가 한국 사회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를 조사하러 온 유엔 특별 보고관을 미행한 것도 한국정부의 외교통상부 직원이다. 누구든 사찰하고 미행하고 감시할 수 있다는 걸 증명했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6. 그 외에도 공무원, 교사에 대한 표현의 자유 침해는 언급안하겠다만, 기소, 고발, 고소 등으로 표현의 자유 위축시킨건 명백하다.

7. 이번 PD수첩 사태 역시 표현의 자유 침해 연장선에서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 물론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근거는 없지만 사람들이 청와대를 의심하는 건 우리 사회 표현의 자유 침해가 사회 전반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그에 대해 정부가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 생애 최초의 폭풍 트윗의 내용이다.


적어도 우리 사회 전반에 표현의 자유 등의 기본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건 이번 PD수첩 불방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가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등의 기본권 침해에 대해 특별한 조처를 취할 생각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인권을 침해하는 무언가를 하는 것도 나쁘지만, 인권이 침해당하고 있는 현실을 그냥 놓아두고 있는 것 역시 잘못이다. 이것이 정부가 우리 사회의 인권을 후퇴시키고 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이번 PD수첩 불방 사태에 대해 억울해 할 것만 아니다. 우리 사회 인권 보호를 위한 정부 차원의 대책은 내놓지 않는 한 사람들의 시선은 언제나 청와대를 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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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에 우리나라가 동참하면서 이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언론들은 이란과의 경제 교류 분야에서 있을 우리 기업의 피해를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란 사람들의 삶과 의식에 대한 접근은 찾아보기 어렵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란을 과격한 종교의 나라로 오해하고 있는 이면에는 언론의 책임이 크다.


이전부터 서방 세계와 끊임없이 마찰을 빚어 온 이란은 서방 언론 매체를 통해 과격한 종교 국가의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지난해 반정부시위의 강경 진압 과정에서 보여준 이란 정부의 대응은 지나치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여기에 ‘이슬람’이라는 편견을 씌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003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란의 여성 변호사 시린 에바디는 2009년 만해평화상 수상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물론 유감스러운 사건이 있지만 그게 이슬람의 전부는 아닙니다. 같은 이슬람 정부라고 해도 여성 총리가 나온 나라가 있을 정도로 이슬람도 다양한 해석을 가지고 있으며 충분히 인권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어요. 다만 비민주적인 정부들이 인권을 억압하는 정책에 ‘이슬람’이란 말을 남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립스틱 지하드, 하이힐 혁명

지난해 있었던 이란의 반정부 시위는 일명 ‘립스틱 지하드(성전)’, ‘하이힐 혁명’으로도 불린다.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들의 활약이 눈부셨다는 것이다. 이란의 젊은 여성들은 6~7월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개혁파의 상징색인 녹색 스카프나 깃발을 든 채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여성의 정치 사회 운동 기반과 민주주의 의식의 저변 확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모습이다.


이전부터 이란은 다른 나라에 비해 자유롭고 실용주의적인 부분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공식적인 옷차림 규제는 매우 엄격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허용치를 넘나드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10대들은 속이 비치는 머리스카프로 흉내만 내면서 엉덩이도 덮이지 않는 짧은 겉옷을 입고 다닐 정도다.


또 이란의 인터넷과 휴대폰 보급, 그리고 그 여파도 이번 시위에 큰 역할을 했다. 온라인 상에서 빠르게 전파되는 시위 소식은 그대로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란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혈 사태를 곧바로 감지할 수 있어서 세계 여론을 끌어들이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유혈 진압의 상처와 그 치유

결과적으로 지난해 대통령 선거는 이란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 되고 말았다. 선거 부정에 대한 여러 의혹들이 제기되었고, 그 의혹을 표출하는 이란 민심에 대한 무자비한 유혈진압이 일어났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2010년 보고서에서 “지난 1년간 이란 정부의 국민통제는 더욱 강화됐고 혁명수비대와 ‘바시지’ 민병대, 경찰의 민간인 탄압과 불법체포, 감금, 폭행이 상시화 됐다”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국제엠네스티는 1년간 체포된 이란 반정부시위대가 5,000명이 넘는다는 보고서를 냈다.


또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란 교도관들이 수감자를 구타하고 강제로 수감자의 손톱을 뽑는 등 가혹행위를 저지른 사실이 온라인 등을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는 수감자에 대한 인권침해로 악명 높은 카리작 구치소를 폐쇄하라고 지시했으며, 이란 사법부는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체포된 140명을 즉각 석방하기에 이르렀다.


이란의 지난해 유혈 사태는 쉽게 치유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권과 민주주의를 향한 전 세계인의 양심이 지켜보고 응원한다면 그 치유 과정 역시 빠르게 전개될 수 있다. 눈여겨 볼 사실은 이란은 세계 최대의 난민 수용 국가라는 점이다. 유엔 난민고등판무관 자료에 따르면, 이란은 100만 명이 넘는 난민에게 거처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한다. 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쿠르드족 출신인 이들에게 이란 정부는 거액을 들여 사회보장을 제공하고 있으며, 대신 그들로부터 값싼 노동력을 제공받고 있다고 한다.




장금이와 천국의 아이들

이란과 대한민국의 관계는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 분야에서도 꾸준한 교류를 통해 더욱 발전된 관계를 이룰 수 있다. 많은 이란인의 가슴 속에는 온갖 역경과 어려움을 이겨낸 한국 드라마의 ‘대장금’(2006년 이란 국영 TV IRIB에서 방영해 80%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이란 국민들의 인기를 얻었다)이 새겨져 있고,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은 ‘천국의 아이들’(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이란 영화, 2001년 국내 개봉)과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이란 영화, 2009년 국내 개봉)의 맑고 투명한 눈망울을 기억하고 있다.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인권과 민주주의에서 한층 나아진 모습으로 경쟁할 때 세계 평화와 인류애는 더욱 커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에 보낸 글을 재수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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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무엇 하나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스스로 저차원적인 욕망을 제어할 수 없는 동물과는 다른 존재로 비유하고 있으면서도 고차원적인 동작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해내는 기계와도 다르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존재죠. 어느 하나로 결론지어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노동자가 일만 하는 기계가 아니듯이 아이들 역시 공부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조금만 참고 바짝 쪼이면 잠시나마 성적을 올릴 수 있겠지만 아이들의 자주성과 창의성 등은 그 과정에 말살되기 쉽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의 장래(대개는 대학과 직업의 동의어입니다)를 위해 서로가 조금만 참고 노력하자고 합니다만 실상 보이는 현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적을 통해 볼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는 극히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끝까지 의지를 밀고 갈 수 있도록 책임감을 북돋우고, 필요한 조건과 환경을 같이 고민해 만들어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절제와 인내의 힘을 배울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가 학교 공부를 통해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교훈이겠죠. 성적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긍정적 결과물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석차는 이 과정에서 교훈과는 전혀 관계없는 부산물일 뿐입니다. 석차는 사회가 필요로 해 아이들을 서열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대학을 고르는 사회가 아니라 대학이 아이를 고르는 사회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모습은 바뀌어야 합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통계청 결과에 따르면 15~24세의 사망 이유 중 자살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자살의 이유는 가족 문제나 이성 문제 등도 섞여 있겠죠. 하지만 학교 및 학업과 관련된 자살 기사는 심심치 않게 신문지면 한쪽을 채우고 있습니다. 청소년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 할 수 있는 사회적 노력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조심스럽지만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국 사회만큼 성적과 체벌을 통해 청소년의 삶을 옥죄고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책임과 의무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권리와 자유도 주어져야 합니다. 권리와 자유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책임과 의무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책임과 의무에 대해 무지하다며 권리와 자유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위의 악순환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아이들에게서 우리의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아이들을 험악한 원형경기장의 검투사로 만들어 옆의 친구를 쓰러뜨리고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보다는 드넓은 자연에서 모험을 통해 협력과 협치를 이해하며 책임과 의무를 배울 수 있는 교육이 더 좋은 교육이 아닐까요?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말하고 서로의 가치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아이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고 미래를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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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지금 이건 너희들이 자초한 거다.”

“이게 다 너희들을 위해서다. 이렇게 해야 사고가 나지 않으니까.”

“역시 맞아야 제대로 돌아가지.”

“너희들한테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우리도 어쩔 수 없다.”


내 군대 시절, ‘집합’이라고 불리는 얼차려 시간에 고참병들이 늘어놓는 말이었다. 공식적으로 군은 병사 간에 신체적 폭력을 동반하는 얼차려나 기합을 금지하고 있다. 내 군대 시절도 벌써 10년 전 일이고 실제 군대를 다녀온 많은 후배들이 지금은 ‘집합’ 같은 건 없다고 하니 다행이다.


“많은 아이들을 통제하려면 어쩔 수 없이 매를 들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하는 거죠. 우리도 그게 좋아서 하는 거겠습니까?”

“애들은 맞으면서 크는 거죠.”

“사랑의 매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감정 없는 체벌은 필요합니다.”


군대 내에서 들었던 고참들의 말과 다를 바가 없다. 학교 현장에서 수많은 아이들을 통제하려는 과정에서 체벌은 강력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하지만 신체적 체벌은 아동에게 장단기적인 잠재적 피해를 가져온다는 사실이 개인과 사회에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2006년에 발간된 ‘UN아동 폭력에 대한 최종 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아동은 시종일관 모든 폭력이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랬다. 어른들의 용인과 승인 하에서 이루어지던 폭력은 아동에게 신체적 그리고 심리적 피해를 가져왔다.”


전 세계의 아이들은 애타게 자신이 신체적․정신적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원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권리이며, 아동청소년 역시 인권의 주체라는 점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우리 사회가 헌법적․법률적으로 어떤 인간에게도 신체적 정신적 폭력에 대해 관대하지 않음에도 유독 아동에게만 체벌을 가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많은 어른들이 아이를 때리는 것은 아이를 올바른 길로 안내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고 실제로 그런 마음으로 매를 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여성이나 일반 성인에게 행해지는 신체적․정신적 폭력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어떠한 것도 인정하지 않고, 최소한의 폭력 수준이라는 기준점도 마련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아동 역시 그런 폭력의 허용이나 기준선 마련은 불필요한 것이다.


한편에서 법제정자들과 정부, 학교 당국자 등은 체벌과 관련한 기준선을 제시하는 규정을 통해 아동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상 그 규정이라는 것은 ‘아동을 때리는 방법, 나이에 따른 강도, 몸의 부분, 사용되는 도구’ 등을 정하고 있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규정을 세계에 내놓는다면, 선진화를 외치고 있고 G20 회의를 개최하는 나라로서 망신만 당하고 말 것이다. 이미 아동권리위원회가 지난 2003년 우리나라에 체벌 금지를 권고한바 있다.


체벌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규정을 두는 것 자체가 어쩌면 우리 사회가 아동청소년을 바라보는 전근대적인 문화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또한 세계에 내놓기 부끄러운 규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라도 해서 보편화되어 있는 체벌에 대한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국가인권위는 2002년 교육부가 발표한 학교생활규정(안)을 검토한 뒤, 직접적으로 체벌 금지를 권고했다. 당시 교육부 발표 내용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구체적인 체벌의 기준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별도의 장소에서 제3자를 동반하여 실시, 체벌 도구는 지름 1.5cm 내외, 길이 60cm 이하의 직선형 나무, 체벌 부위는 남자 둔부ㆍ여자 대퇴부, 1회 체벌봉 사용 횟수는 10회 이내’ 등으로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국가인권위는 이에 대해 원칙적으로 체벌 금지를 권고했다.


체벌은 일시적으로 아동을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체벌의 공포에 직면한 아동들은 불안감, 우울증, 학교강박증, 적개심 등 부정적 감정을 버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아동들은 학교나 가정에서 어른들이 훈육이라는 논리로 아동을 때리는 것을 보아오면서, 자신보다 약한 다른 아동이나 동생들을 똑같은 논리를 이용해 폭력적으로 가르치려는 행동을 답습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랑의 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일 ‘사랑의 매’가 있다면, 그 대상은 어른이 되어야지 아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 해 3월 유엔아동권리협약 20주년을 기념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학생체벌 금지와 교육적 대안 모색’ 국제워크숍에서 기조연설을 한 피터 뉴웰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인격적 신체적 존엄성을 아동들은 아직 온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체벌을 법으로 금지해야 하는 것은 부모를 기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인을 때리면 안 되는데 아동은 때려도 괜찮다는 인식과 상황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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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HCR의 친선대사인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



영화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처음 안젤리나 졸리를 알게 된 것은 영화 ‘툼레이더’였다. 캄보디아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졸리는 섹시하고 지적인 여전사의 이미지를 한껏 풍기며 전 세계인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사라기 보다는 인권 천사가 더 어울린다. 그는 2001년 유엔난민기구의 친선대사로 임명받은 이후 30여 개국의 난민촌을 누비면서 난민들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렸고, 그가 직접 기부한 금액만도 수백만 달러에 달한다. 그가 캄보디아와 에티오피아의 아동을 입양한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인권전문가들에게 졸리는 여전사이기 보다는 난민인권옹호가로서 난민들의 천사라는 점은 분명하다.

2001년 그가 처음 유엔난민기구(UNHCR)의 친선대사가 됐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의 영화 ‘툼레이더’를 홍보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다. 영화 ‘툼레이더’가 그가 영화배우로서 인기를 얻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는 영화를 촬영하며 본 캄보디아의 난민 상황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영화촬영을 마치고 2년 후인 2001년 7월 그녀는 UNHCR의 초청으로 다시 캄보디아를 찾았을 때, 아마 그녀는 이미 난민들을 위해 살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거기서 그녀는 난민 정착 운동을 펴고 있는 크메르 루즈 지역을 집중적으로 돌아보았고, 공산반군이 최후까지 저항한 안롱방도 방문했다. 이 방문은 여정의 마지막 날에 언론에 공개되었다.

그가 캄보디아를 방문한 다음 달 8월 21일 UNHCR은 그녀를 유엔 친선대사로 선정한다고 발표했다. 사실 유엔의 친선대사로 선정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유엔의 각 기구들은 친선대사 활동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내부적으로 엄격한 조건과 자격 및 활동 기준을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해당 분야에 대해 꾸준한 관심과 헌신적인 노력을 필요하기 때문에 친선대사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후 시에라리온, 탄자니아, 캄보디아, 에콰도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 고통 받는 난민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찾아갔다. 그 과정에서 캄보디아와 에티오피아 아동을 입양했고, 자신의 자녀들과 함께 난민촌 캠프를 찾아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2007년 3월 미국주간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2년간의 친선대사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처음 2년여간은 어떤 일도 감정적으로 되지 않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눈물의 시간을 보낸 다음에는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국제문제와 관련된 많은 책을 읽으면서 보다 큰 그림 속에서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그는 난민들을 진실한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이성적으로 난민 문제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워갔던 지적인 여인이다. 2002년 유엔 기자협회는 그녀에게 ‘유엔 세계 시민상’을 수여했고, 2005년에는 유엔이 ‘유엔 글로벌 인권상’을 전달하기에 이른다.

그가 영화 홍보 차 우리나라를 방문했음에도 기자 회견에서는 영화 내용과는 관계없는 탈북난민 문제에 대한 질의가 나오기도 했다. 그녀가 유엔 친선대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풍경이다.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우리나라의 난민 실태 조사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8년에 국내에 거주 중인 난민 신청자, 난민 인정자, 인도주의적 체류허가자 등 3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 및 심층 면접 조사 방식으로 실태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국내 거주 난민들은 난민 신청 과정에서 법률적인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고, 난민 신청 후 인터뷰하기까지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고 있었으며, 인터뷰 과정에서도 통역 서비스 등을 제공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난민 신청자 중 취업 등을 이유로 장기 구금된 경우도 있었으며,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의 지위 인정이 안될 뿐 아니라 아무런 사회통합 프로그램도 없었다.

안젤리나 졸리는 2005년 유엔글로벌 인권상을 받는 시상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망명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매우 큰 특권이며 우리의 아이들에게 관용과 이해의 세계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보다 더 큰 임무는 없다고 본다.”

그의 말처럼 박해와 탄압을 피해 자유와 평화를 찾아 우리나라로 찾아 온 모든 이들에게 우리나라의 따뜻한 관용과 이해의 깊이를 보여줄 수 있는 난민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 에 기고한 글을 재수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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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무엇 하나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스스로 저차원적인 욕망을 제어할 수 없는 동물과는 다른 존재로 비유하고 있으면서도 고차원적인 동작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해내는 기계와도 다르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존재죠. 어느 하나로 결론지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노동자가 일만 하는 기계가 아니듯이 아이들 역시 공부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조금만 참고 바짝 쪼이면 잠시나마 성적을 올릴 수 있겠지만 아이들의 자주성과 창의성 등은 그 과정에 말살되기 쉽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의 장래(대개는 대학과 직업의 동의어입니다)를 위해 서로가 조금만 참고 노력하자고 합니다만 실상 보이는 현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적을 통해 볼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는 극히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끝까지 의지를 밀고 갈 수 있도록 책임감을 북돋우고, 필요한 조건과 환경을 같이 고민해 만들어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절제와 인내의 힘을 배울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가 학교 공부를 통해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교훈이겠죠. 성적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긍정적 결과물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석차는 이 과정에서 교훈과는 전혀 관계없는 부산물입니다. 석차는 사회가 필요로 해 아이들을 서열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대학을 고르는 사회가 아니라 대학이 아이를 고르는 사회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모습은 바뀌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있습니다. 지난해 통계청 결과에 따르면 15~24세의 사망 이유 중 자살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자살의 이유는 가족 문제나 이성 문제 등도 섞여 있겠죠. 하지만 학교 및 학업과 관련된 자살 기사는 심심치 않게 신문 지면 한쪽을 채우고 있습니다. 청소년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 할 수 있는 사회적 노력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조심스럽지만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국 사회만큼 성적과 체벌을 통해 청소년의 삶을 옥죄고 있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책임과 의무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권리와 자유도 주어져야 합니다. 권리와 자유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책임과 의무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책임과 의무에 대해 무지하다며 권리와 자유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위의 악순환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아이들에게서 우리의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아이들을 험악한 원형경기장의 검투사로 만들어 옆의 친구를 쓰러뜨리고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보다는 드넓은 자연에서 모험을 통해 협력과 협치를 이해하며 책임과 의무를 배울 수 있는 교육이 더 좋은 교육이 아닐까요?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말하고 서로의 가치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아이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고 미래를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인권위원회 블로그 '별별이야기'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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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야유회를 다녀왔다. 사람들의 평점은 5점 만점에 4.18점. “참 잘했어요.”에서 “참”을 빼는 정도가 되겠다. 무난하게 끝났지만 스스로 평가해 보면 좋지 않다. 많은 사람과 함께 행사의 취지와 내용을 만들어 가는 과정, 그 안의 불만들을 받아 주고 서로가 다른 의견들을 하나로 모아가는 일, 야유회의 진행 과정에서의 부자연스러움 등은 나에게는 참으로 벅찬 일이었다. 거기다가 갑자기 몰려든 교재 편집업무까지 어느 것 하나 수월하게 진행된 것은 없었다.


돌아보면 사람들의 불만을 모으고 그 불만을 넘어 더 나은 결과를 내고자 했던 여러 실험들은 그다지 바람직한 결과를 내오지 못했다. 설문조사 자체에 대한 실험은 사람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갔으나 내용과 결과의 해석은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소집단의 의견수렴은 설문조사보다는 심층면접이나 익명성을 강조한 의견서 작성이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이후 다른 사례에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충분한 시간과 지원은 꿈꾸기 힘들기 때문이다. 오로지 경험과 야근만을 강요하는 환경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야유회 행사에서도 미숙한 진행은 어쩔 수 없었다. 내 성격이 ‘다큐’에는 강해도 ‘예능’에는 젬병이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게다가 너무 자만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남들 앞에 나서본 일이 없고, 하다못해 반장 한번 안 해 본 내가 뭘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야유회가 재미없었던 것은 아니다. 행사를 준비하는 초기에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보이콧을 생각할 만큼 분위기는 무척 안 좋았다. 설상가상 설문조사 과정에서 팀장의 심기까지 건들고 만 일도 있다. 이때의 분위기는 험악하기까지 했었는데, 이런 과정을 무사히 넘겨 한 사람 빠짐없이 참여하는 야유회를 만들어 낸 것도 큰 성공이라고 자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유회나 워크숍이 회사에 대한 애사심을 만드는 장이 되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심지어 팀별 워크숍이나 야유회가 회사의 공식 행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회사의 앞날을 암울하게 한다. 어디까지 믿고 따를 수 있을까에 대해 조직원들의 의심은 깊어만 간다. 물론 다른 회사의 경우를 본다면 그나마 인간적이라는 게 세간의 평이다. 하지만 회사는 '예능'이 아니라 '다큐'다.  조직은 그 무엇보다 살벌하게 돌아가기 나름이다. 그런 조직이 애사심을 갖게 하기 보다는 다른 탈출구나 요령만 생각하게 만든다면, 그 회사의 리더십은 바닥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다행인 것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선한 사람들이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면 좋지 않은 조건과 환경에서도 충분히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무엇보다 서로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회사 생활을 엮어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이 회사의 가장 큰 자산이 아닐까. 야유회는 그런 성심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멋진 작품이었다.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



난지캠핑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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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의 "이제 됐어?"


끊임없이 홀로 전장터로 내몰리는 전사의 비애였을 것이다. 수없이 무찌르고 베어냈지만 여전히 몰려드는 검투사들, 끝나지 않을 원형경기장의 전투. 그렇게 원형경기장의 중앙에 우뚝 섰지만, 저 시체들 너머 더 큰경기장에서 더 잔인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고 누군가가 알려줬을 것이다. 아니, 이미 중앙에 올랐을 때 그는 알았을 것이다. 나는 누구를 쓰러뜨리고 내일을 기약해야 하는가. 더군다나 내 자리를 빼앗기 위해 달려드는 다른 검투사들과의 싸움은 언제쯤 끝날 것인가. 이 피의 비는 언제 그칠 것인가.

사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경쟁 사회에 익숙해져갔다. 다행히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우리는 더 강한 자라고 자위하고 있다. 사실 원형경기장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대학을 나와서도, 직장에 다니면서도, 그 치열한 전투의 트라우마는 번번이 삶의 한가운데서 불쑥 불쑥 고개를 내밀기 일쑤다. 그렇게 흔들리는 삶을 살아가며 끝나지 않은 전투를 벌이고 있다. 더 큰 원형경기장에서 더 큰 어른들과 벌이는 전투는 그저 성적표의 성적이 좀 떨어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삶을 뭉텅이로 도려내고 나락으로 처박아 버릴 수 있는 잔인한 싸움이다.





어쩌면 그 아이는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됐어?"와 "이제 됐어!" 그가 마지막에 썼다는 그 물음표는 오히려 느낌표 보다 더 강렬하게 우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지금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극렬히 저항하고 있다. 그네들이 저항할 수 있는 모든 수단들은 철저히 막혀 있고,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인 자살로 내몰리고 있다. 절규하고 아파하는 아이들을 외면하는 사회는 결코 오래갈 수 없다.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학교 안에서라도 아이들이 숨쉴 수 있게 하자는 것을 이념 갈등으로 치부하는 저 몰지각한 어른들에게 우리 아이들의 절규는 들리지 않는 것일까.

이 잔인하고 비열한 전투는 모두를 패배자로 만들었다. 단지 몇몇 한줌도 안되는 승자, 그것도 엄청난 재력과 권력을 이용해 등극한 승자들을 위한 요식행위에 동원되는 그저그런 사람들을 피할 수 없는 패배자, 루저의 나락으로 내볼고 있는 것이다.

다른 생각을 꿈꿀 수 있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교육, 그것은 원형경기장의 담장을 허물어 버리는 시작이다.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말하고 서로의 가치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아이들을 구하고 미래를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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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상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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