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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간 구상나무

백두대간 7 - 산죽길에서 만나는 바람 본문

생활 여행자/백두대간 이야기

백두대간 7 - 산죽길에서 만나는 바람

구상나무 구상나무 2008.07.13 13:36
 


산죽길에서 만나는 바람


 

-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덕유산까지 9박10일의 이야기 7

- 중재 >> 백운산 >> 영취산 >> 깃대봉 >> 육십령(19.1km)

- 2008.07.01.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을 잤다. 새벽에 일어나도 상쾌하다. 태생적으로 낯선 곳에서도 잠을 잘 잔다. 산속에서 자고 나면 기분은 늘 좋다. 며칠전까지 내 어깨에는 항상 파스가 붙여져 있었다. 이제는 파스가 없어도 괜찮을 정도로 어깨가 단단해졌다. 무거운 배낭과 몸무게를 지탱했던 무릎과 발목은 신기할 정도로 멀쩡하다. 넘어지고 까지는 일이 없었다. 몸은 이미 자연과 공명하고 있었던 것일까.


6시에 민박집을 나왔다. 짙은 안개가 중재 마을을 살포시 보듬어 안고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이번에도 차량으로 고갯마루 근처까지 배웅해 주셨다. 중재에서 이날의 첫 발걸음이 시작됐다. 중고개재까지는 가뿐한 산책로와 다를 바 없다. 단지 짙은 구름 때문에 저녁날씨가 어찌될지 걱정될 뿐이다. 환국이가 보내온 기상정보에 따르면 오후에는 비올 확률이 높다. 발걸음을 재촉해야 할 이유다. 이날은 덕유산 초입인 육십령까지 달려야 한다. 어제처럼 먼 거리는 아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 중고개재에서



중고개재부터는 백운산으로 치고 올라가는 길이다. 내 발걸음에 놀란 나비가 팔랑거리며 내 앞을 지나갔다. 내 한걸음이 길섶의 작은 세상을 뒤흔드나 보다. 조그마한 날벌레들이 발 아래에서 요란하게 춤을 춘다. 내 귓가에서 웽웽거리며 날아다닐 때면 너무나 귀찮다. 손으로 휘휘 저어보지만 금방 다시 날아든다. 비가 오면 모두들 풀잎 밑으로 숨어들지만, 날씨가 좋으면 이렇게 사람을 괴롭힌다.


백운산을 치고 올라가는 길은 힘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길, 숨이 가슴을 조여올 때면, 갈비뼈를 열어서라도 숨을 더욱 크게 쉬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뜨겁게 데워진 발바닥도 떼어서 냉동실에 잠깐 넣어놓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숨을 가다듬고, 발바닥을 나무에 퉁퉁 쳐주면서 위로해 준다. 어차피 올라야 할 산이라면, 기꺼이 즐기면서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 좋다. 아무도 없으니 혼자서 노래라도 불러본다. 새소리의 엇장단이 나쁘지 않다. 땀이 흐르는 뺨과 목덜미로 바람의 애무가 간지럽다. 기분이 좋다. 힘들었던 숨쉬기의 고통은 금방 가시고 입꼬리가 가볍게 말려 올라간다.


8시 10분. 마침내 백운산에 올랐다. 정상은 작은 공터를 이루고 있어 사방으로 거칠 것이 없다. 동서남북이 훤하게 트여있는 봉우리다. 멀리 지리산도 가물가물 펼쳐져 있다. 그 까마득한 하늘너머에서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 백운산 정상에서는 날이 좋으면 지리산과 덕유산이 모두 보인다.


▲ 백운산에서부터 간간히 나타나는 산죽길.


▲ 영취산 정상의 갈림길.

▲ 영취산 정상의 표지석.

백운산에서는 날이 좋으면 지리산과 덕유산 모두를 볼 수 있다. 여기서 대간 길은 영취산까지 완만한 능선길이다. 그러나 여느 능선길과는 다른 멋이 있다. 바로 산죽길이다. 책에는 영취산 이후부터 나온다고 나왔는데, 백운산을 넘어가자 내 키보다 더 자란 산죽들이 빽빽하게 도열해 있다. 또 책에서는 산죽이 너무 빽빽해 헤치고 나아가기 힘들다고 되어 있는데, 다행히 등산길 확보를 위해 좌우의 산죽 일부는 제거해 놓은 상태였다. 산죽이 주는 시원함과 고즈넉함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번 백두대간에서 소나무숲길과 함께 여기 산죽길이 가장 기억에 남는 길이다. 산죽밭은 영취산 넘어서도 간간히 나왔다.

 

10시 영취산 정상에 올랐다. 여기서 300여m를 내려가 무령고개에 가야 샘이 있다. 내려가는 일이 만만치 않다. 가지고 있는 물은 많지 않았다. 지도를 보니 덕운봉을 지나 능선 가까이에 샘이 있다고 나왔다. 지도를 믿고 더 나아갔다. 하지만 덕운봉을 한참을 지나 민령 가까이 가서도 샘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물통의 물도 거의 떨어져갔다. 같이 가는 사람들이라도 있으면 물이라도 좀 얻어보겠지만 어제처럼 산속에서 사람을 전혀 만나지 못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977고지에서 점심을 먹었다. 샘을 찾으려다가 자꾸 미루던 점심이라 매우 허기져 있었다. 또 물 없는 점심이라니... 그렇게 신발도 벗고 점심을 먹고 있으려니 내가 왔던 숲에서 부스럭거리며 사람의 거친 호흡소리가 들린다. 한분이 힘들여 올라오고 있었다. 밥을 먹다가 반갑게 인사했다. 그분도 사람은 내가 처음이란다. 물을 얻어볼까 했더니 나처럼 중재에서 출발해 그분도 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더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갈증을 참는 일도 쉽지 않다. 점심을 먹고 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분이 먼저 출발하고 나도 슬슬 짐을 챙기기 시작할 때였다. 또 한 사람이 봉우리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분은 영취산에서 오신 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물이 풍부했다. 그분 덕분에 마음껏 물을 마실 수 있었다. 물 때문에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고 사람들 신세도 많이 진다.


영취산에서부터 산죽길은 이전보다 더 장관이다. 백운산과 깃대봉 사이에 있는 곳곳의 산죽길은 대나무 내음을 물신 풍기면서 풋풋한 바람을 살랑살랑 내보내준다. 산죽 뒤로 크게 자란 나무들이 자연스러운 그늘을 이루어 주어, 사자처럼 사나운 햇살도 여기서는 털복숭이 강아지처럼 부드러워진다. 한참 쉬고 있으려니 참새보다 작은 새들이 산죽 사이로 오가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귀엽다.


민령서부터는 급한 오르막이 다시 열린다. 깃대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깃대봉에 오르니 감회가 새롭다. 여기에서는 덕유산의 산줄기가 더욱 명확하게 들어온다. 지리산에서 출발한 여정의 끝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가깝게는 할미봉이 불쑥 솟아 있고, 그 뒤로 장수덕유산과 남덕유산이 가깝다. 다음날이면 할미봉을 넘어 본격적인 덕유산 자락으로 들어가게 된다.


▲ 쉬고 있으면 초록의 나무그늘이 나를 달래준다.


▲ 깃대봉에서 바라본 덕유산 자락. 멀리 서봉(장수덕유산)과 남덕유산이 보인다.

▲ 영취산에서 출발한 등산객이 깃대봉에서 찍어준 사진.  


▲ 육십령 마루로 내려서서  


▲ 육십령 식당. 백두대간 종주 등산인들이 많이 찾아 왔나 보다.  



깃대봉을 넘어 조금만 내려가자 샘터가 나온다. 물이 풍부한 곳이다. 이곳을 즐겨 찾는 사람들이 팻말도 어여쁘게 만들어 놓았다. 물이 맑고 맛있다. 갈증이 깊어서이기도 하겠지만, 바위틈에서 힘차게 솟아나오는 물줄기는 보기만 해도 시원하기 때문이다.


샘터를 지나 급한 내리막이 이어진다. 계곡으로 내려가는가 싶지만 곧 능선길을 만난다. 다 왔다 싶은데, 한참을 가야 육십령이다. 지루하고 고단한 길이다. 육십령 고갯마루에서 동쪽(서상쪽)으로 50m만 가면 식당 겸 매점과 민박을 겸하고 있는 육십령식당이 있다. 현금이 얼마 없어 카드로 계산해야하는데 혹시 안된다고 하면 천상 서상읍이나 장게면으로 내려가야 할 판이다. 다행히 주인 할머니는 가능하단다. 이날은 이곳에서 여장을 풀었다. 육십령 마루에는 가는 비가 오기 시작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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