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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간 구상나무

온갖 이야기들을 물고 오는 나의 앤 본문

사막에 뜨는 별/서가에 피는 꽃

온갖 이야기들을 물고 오는 나의 앤

구상나무 구상나무 2018.05.03 06:55

아이의 상상력, 수다, 꿈...

"아빠, 그 얘기 알아? 내 친구 수연이는 저번에 바람 많이 불고 비오던 날 우산 쓰고 점프를 했더니 공중으로 3초간 떠 있었데."

우산을 쓰고 집으로 가는 도중 아이가 재잘거리며 말한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 아이 동생도 하늘을 날았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아이의 상상력을 돋우려고 난 꿈속에서 하늘을 날았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몸을 꿈틀거리면서 거미줄처럼 엉켜있던 전깃줄 사이를 지나 제비처럼 낮게 지면을 수평으로 비행했다가 다시 공중으로 붕 떠서 어느 순간 구름 위를 날았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어릴 적 꿈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이제 그런 꿈은 꾸지 않는다. 아니 못하는 게 맞는 말이겠지. 


"아빠 나 나가니까, 바로 전화해야 해, 알았지?"

이제 혼자서도 놀이터나 심부름 정도는 갈 수 있는 나이가 됐지만 여전히 무서움이 많다. 외출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두려움은 엘리베이터 귀신이다. 엘리베이터 문을 제외한 3면에는 거울이 붙어 있는데, 혼자 있으면 그 거울에서 귀신이 나와서 붙잡을 거라는 게 아이의 믿음이다. 터무니 없는 믿음이라고 아무리 설명해 주고 온갖 이야기를 새로 꾸며 주어도 여전히 공포심이 남아 있어서, 꼭 엘리베이터 안에서 통화를 하고 있어야 한다. 


"아빠, 사춘기는 언제부터 와?"

"글쎄, 사람마다 다르겠지. 그건 왜?"

"응 난 4학년 때부터 오는 거 같아. 자꾸 요즘에 짜증이 많이 나고 그래."

곧 질풍노도의 시기가 오겠지. 짜증 많고 신경질적인 아이가 되면 어쩌나 고민이다. 제발 석판으로 자신을 놀리는 남자 아이를 후려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학폭위에 나가 고개숙이는 일은 피하고 싶다. 빨강머리 앤이 자신을 '홍당무'라고 놀리는 길버트를 석판으로 후려쳤을 때는 아마 사춘기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긴 못생겼다고 대놓고 말하는 린드 부인 앞에서 얼굴이 벌겋지도록 화를 내던 모습도 딱 사춘기의 앤일 것이다. 그래서 궁금했다. "빨강머리 앤"을 원작으로 읽어 볼까?



다시 만난 빨강머리 앤 

2013년에 다시 돌아온 빨강머리 앤 애니메이션


다시 만났다. 얼마만일까? 앤을 만났던 건 일본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리고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아이를 위해서 빨강머리 앤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보여 준 일이 있다. 추억 속에서 자라던 앤이, 그 말많고 실수투성이 앤이 성큼 내 앞에 다가왔다. 최근 서점가에서는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백영옥, arte)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어릴적 조실부모한 소녀 앤이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초록 지붕 집 커스버트 남매에게 키워지면서 겪는 과정에서 온갖 실수와 사건들이 얽히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넘어 큰 위로와 위안을 주었다. 내 또래의 중년에게도 1980년 대에 접했던 <세계 명작 극장> 중 '빨강머리 앤'의 이야기는 큰 재미를 주었던 시리즈 중의 하나였다.[각주:1] 

그래서 다시 꺼내 보았다. 집에 있는 빨강머리 앤은 어린이용 문고판으로 있어서 '더클래식'에서 나온 이북판으로 구입했다. 읽는 내내 즐거웠다. 옆에서 아이가 재잘거리는 걸 실감하며 즐겼다. 실제 내 아이도 수다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것과는 좀 다른 세계였다. 1900년대 초반 아이의 상상력과 21세기를 달리는 아이의 상상력은 다를 수밖에 없겠고, 어른이 만들어 낸 이야기 속의 앤을 최첨단 도심 속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아이와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만, 어린 아이의 감성이야 옛날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캐나다의 작가로 소설의 배경인 프린스 에드워드 섬 출신으로 풍경에 대한 묘사가 매우 사실적이면서 낭만적이었다. 소설 속에서 앤이 매튜 아저씨를 처음 만나서 초록 지붕집으로 가는 여정에서 아름다운 벚꽃길을 지나는 장면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애니메이션에서는 매우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그려졌는데, 앤의 상상력이 환상적으로 묘사되어 인상깊게 남아 있다. 그러나 소설은 영상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글이 주는 여유와 틈이 더 넉넉한 마음을 품게 한다. 애니메이션이 주는 화려함보다는 글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더 좋다. 물론 영상과 글은 매우 다르다. 글은 읽는 사람의 상상력만큼 펼쳐지겠지만, 잘 만들어진 영상은 보통 사람의 상상력 그 이상의 자극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힘은 보다 깊은 생각과 상념으로 이끈다. 이것이 아마도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110년 전의 앤, 그리고 현실의 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빨간 머리 앤’ 한 장면. 주인공 에이미베스 맥널티는 원작 속 앤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올해 2018년은 앤이 세상에 나온지 110년이 되는 해란다. 한 세기를 넘어서 사랑받는 앤의 매력은 아이다운 순수함과 끝없이 재잘거리는 활기, 엉뚱하기 그지 없는 상상력에 있을 것이다. 여전히 지금을 사는 아이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보인다. 마릴라 역시 그런 앤의 모습을 사랑하면서도 앤에게 너무 시끄러다고 핀잔을 주었고, 얌전히 굴어야 한다고 야단쳤으며, 착한 아이가 되라고 훈계하고, 아이들끼리 어울려 엉뚱한 짓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잔소리한다. 지금의 어른들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110년 전의 앤과 지금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은 별반 다르지 않고, 110년전의 마릴라나 지금의 어른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 더 풍요로운 세상이라고 말하면서도 이야기는 고갈되고 상상력은 말라가며, 대화는 줄어들고 시간에 쫓기며 산다. 


앤이 지금까지 사랑받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말썽도 많고 엉뚱하기도 했던 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믿어주었던 매튜 아저씨, 언제나 잔소리를 하고 혼냈지만, 앤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마릴라, 앤의 마음의 친구 다이내나, 앤의 재능에서 가능성을 보고 적극 지원한 스테이시 선생님, 앤이 슬프고 힘들 때 좋은 멘토가 되어 준 앨런 부인 등 많은 이들이 앤의 성장에 영향을 끼쳤다. 지금을 사는 아이들에게 온 마을이 주는 도움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길은 아직 열려 있는 것일까 문득 생각해 본다. 


앤의 탄생 110주년을 맞아 넷플릭스에서는 지난해 새로운 버전의 '빨강머리 앤' 드라마 시리즈를 내놓았다. 대본을 쓴 작가(월리-베켓)은 앤이 그저 순수하고 낭만적인 수다스러운 아이라는 것에 더 깊이 현실적인 아이로 그려내려고 했다. 

당시 진단이 있었으면 앤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예요. 무엇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혼자 상상에 빠지며 가상의 친구와 얘기하잖아요. 넷플릭스 버전은 귀엽게만 생각했던 앤의 특징을 병리적으로까지 밀어붙인 거죠. 해외 리뷰를 보면 앤의 증상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보기도 합니다. 어려서 학대를 당한 아이가 새로운 가정을 찾았다고 한 번에 치유되기가 어렵다는 걸 보여준 거죠. 이게 흥미로운 지점이라 생각했어요. 앤을 꿈과 희망을 주는 예쁜 친구로만 볼 게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기쁨과 아픔을 같이 보자는 취지거든요.  

원문보기:  경향신문(2017. 6. 9.) 기사 '너무나 현실적인 넷플릭스의 앤... 그래도 너는 나의 앤'



한 아이가 성장하는 데에 있어 주위의 지원과 응원, 그리고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디 그것이 쉬운 일일까?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어찌보면 매튜와 마릴라의 사랑을 비롯해 주위 사람들의 관심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일이다. 




  1. <세계명작극장>과 관련한 좋은 글 추천 http://slownews.kr/6043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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