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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나무 아래에서/일상의 발견

내 기억 속의 노무현

구상나무 구상나무 2009.05.27 16:02



1.

노무현 후보 역시 사람이라 번번이 여러 유혹 앞에서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그런 유혹에서 건져낸 것도 건강한 상식과 믿음을 가졌던 많은 시민들의 힘이 아니었을까요?

대선을 열흘도 남지 않은 2002년 12월 10일, 개혁당 구로지역 게시판과 대학 동문회 카페에 썼던 글 "이번 대선은 축제다"의 일부입니다. 선거가 처음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신나게 즐겁게 선거를 즐겼던 적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전 1997년 대선에서는 선거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도 되었던 전적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노무현 후보와 함께 했던 그 때가 제 생애의 최고 절정이었습니다. 이긴다는 확신도 있었고, 변화에 대한 기대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그 역사의 중심에 내가 서있다는 자랑스러움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노무현은 나에게 위대함 그 자체였던 존재였지요.

그렇게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2002년 12월 19일 전 종로 바닥 한가운데서 '수립 민주정부' 노래를 목청껏 외쳤습니다. 누구 하나 손가락질 하지 않았고, 누구 하나 시비걸지 않았고, 모두가 함께 노래 불렀지요.


2.

그러나 다음 해 2003년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 파병을 결정합니다. 당시의 내 심정을 담은 글을 꺼내 보았습니다. 역시 노무현 정부에 대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선택한 대통령이, 엄청난 거짓말을 해대며 전쟁을 벌이는 부시를 쫓아간다는 것에 대해 불쾌함을 넘어 절망적인 심정이다. (중략) 요즘은 그래서 우울하다. 그래서 한껏 기대했던 많은 기대들이 현실이라는 화려한 수식 앞에서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그러나 어쩌랴, 살아가는 일이 조금씩 허물어가는 일일텐데....

이처럼 나는 나의 적극적 선택을 통해 선출한 대통령이 지지세력들의 뜻과는 반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에 대해 매우 실망했지요.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인간 노무현의 결정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잠시 몸담고 있던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한다'는 의견표명을 했습니다. 아쉽게 직접적으로 파병을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국가기관의 하나로 그런 의견표명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모험이었고, 그런 의견표명이 나오기까지 내부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넘어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전쟁 반대 의견표명만으로도 국가인권위는 다른 국가기관 뿐만 아니라 여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습니다. 당시 민주당은  "정부가 이미 파병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황에서 이런 의견제시는 부적절하다"고 평하고, 한나라당은 "국가기관이 사실상 대통령의 뜻에 반하는 입장을 밝힌 것은 본분을 망각한 국론분열 선동행위로 인권위원장은 국민 앞에 정중히 사과하고 사퇴하라"고 성명을 발표했죠.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국가인권위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었습니다. 단 한마디로 정리했죠.

"인권위는 원래 그런 말하라고 만들어 놓은 기관이다."

국가인권위의 존재 목적과 취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인간 노무현의 결정과 대통령 노무현의 결정은 다를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한국의 세계사적 위치가 어디쯤이며 약소국의 한계가 대통령의 짐이며, 그것은 곧 국민의 고통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3.

그리고 그 해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일 행사를 국가인권위에서 주관했습니다. 당시 기념식 행사 중에는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그리고 인권을 위해 일생을 희생해 온 분들이 단상에 올라가 '세계인권선언문'을 차례로 낭독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선언문 낭독이 끝나고 노무현 대통령의 축사 차례가 되었습니다. 단상에 선 노무현 대통령은 "이 분들(선언문 낭독하신 분들) 앞에서 준비된 원고를 읽으면 부끄러울 것 같다"며, 즉석 연설을 시작했지요. 소박하고 담백한 모습의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연설이 시작되고 얼마 후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묵 피켓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인권위 직원들은 사색이 되어 경호팀과 함께 즉각 제지에 나섰고, 객석은 찬물을 끼얹은 듯 썰렁해졌지요. 이때 노무현 대통령은 "몇 분들이 제게 호소하고 불만을 표하고 있다.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다"면서 "국가가 (경쟁사회에서 불리한 여건에 처한 약자를) 돕고 해결해 줘야 인권국가지 인권의 사각지대를 구경만 하는 것이 인권국가냐, 그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 말보다는 저의 실천이 모자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비판하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말고 가자"라고 말하며 그들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고, 피켓 시위는 축사가 끝날 때까지 줄곧 진행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어느 대통령이 저 정도의 인권의식이라도 있었나 싶습니다. 스스로의 실천이 부족함을 성찰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돌아보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물론 그의 실천이 어느정도였는지 역사가 평가하리라고 보며, 지금의 감정적 평가와는 선을 긋고 싶습니다. 그래도 '비판하면서도 믿음은 버리지 말고 가자'라고 하신 그 말씀이 지금에 와서 왜 이리 후회스러운지 모르겠군요. 


4.

노무현 대통령 취임 100일. 군대에서도 100일을 잘 견디면 3년을 견딜 수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100일 휴가도 보내주지요. 저 나름대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100일을 돌아보는 글을 썼었군요.

노무현에 대한 비판은 개혁 세력 전반의 목소리로 나타나야 할 필요가 있지만, 그 주요 목표가 노무현이 되어서는 안된다. "노무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그게 현실이다. 우리는 지나친 꿈을 그에게 기대했던 것이 아닌가?"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노무현을 인정한다. 그가 하는 작업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나 시스템을 제대로 바꾸면 50년이다. 우리 사회에 뿌리 내린 시스템은 바로 미군정 5년간 쌓인 것임을 상기해 보자.

당시 강금실 법무부장관이 한총련 수배자 문제로 수배자의 부모를 만났는데, 경찰들은 보란듯이 그 부모의 자식을 곧바로 잡아들였습니다. 겉으로 보면 통상적인 수배자 검거였을지 모르겠지만, 그 학생은 평상시처럼 학교 바로 앞 길건너 식당에서 학교로 오다가 잡혔던 것이죠. 경찰이 이미 학생의 행동 습관을 알고 있으면서도 잡지 않다가 법무부장관과 한총련 수배자 부모가 모임을 잡은 그 다음 날 잡아들인 셈입니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그것은 시스템입니다. 노무현은 눈에 보이는 사안이 아닌 시스템과 싸워온 대통령이었습니다. 검사와의 대화 역시 그런 면에서 접근한 문제였다고 봅니다.


5.

그냥 미안타 사과하고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에서 지적했듯이 그런 말은 임시방편이고 어쩌면 우리 정치현실을 더욱 퇴보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사과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는가라는 생각을 한다. 대통령의 자리라는 것은 분명 다른 것이다. (중략)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노무현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투쟁가로서의 노무현을 보는 듯하다. 이미 그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순교 아니면 영광만을 향한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가 무척 고심하고 결단을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결정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다시 개인이 아닌 구조를 생각한다.

위 글은 2004년 3월, 총선을 얼마 남지 않은 시점, 그는 국회로부터 탄핵을 당한 사건을 보면서 작성한 글의 일부입니다. 이 당시 그를 보면서, 이제 개인 노무현을 보지 않고, 구조 안의 노무현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노무현에 대한 생각은 잊어야 하는 시기였죠. 그러면서 탄핵 정국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러 촛불집회에도 나갔습니다. 노무현을 구하자는 생각보다는 후진적인 한국의 정치현실을 바로잡자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복귀하길 바라지만 그렇게 물러나게 되어도 국민들의 탄핵반대 집회에서 발현된 에너지가 정치 현실을 한단계 도약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찌 몰랐을까요, 당신의 순교(적절하지 않은 표현일 수도 있지만)가 지금은 너무 가슴 아픕니다.


6.

열린우리당이 국회 다수 여당이 된 이후, 아이러니하지만 난 정치에서 멀어져갔습니다. 개혁당 시절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 열린우리당으로 입당하거나,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하며 민노당으로 옮기는 모습을 쓸쓸하게 지켜보면서 그냥 중립지대로 남고 싶었습니다. 정치개혁을 향한 우리 사회의 열망은 더 뜨거워졌지만 저는 점점 더 차가워졌습니다.

2004년 6월, 김선일 씨가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해 8월 늙은 노동자가 고공 크레인에서 쓸쓸히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2005년에는 시위 농민이 사망했습니다. 2006년에는 비정규직법이 만들어졌고, 그는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라고 말했죠. 2003년 "국가가 (경쟁사회에서 불리한 여건에 처한 약자를) 돕고 해결해 줘야 인권국가" 라고 말했던 그가 시장의 폭력에 손을 들고 만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재직 기간 동안 10여명이 목숨을 끊었고,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분신으로 말하던 시대는 지났다"라는 말로 저를 비롯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유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저 세상에서 그 노동자들을 만난다면 적어도 그 말에 대해서는 사과했으면 좋겠습니다.

2006년, 저 역시 국가인권위원회를 그만두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시장은 인권위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7.

노사모가 노무현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인 바람과 역사적인 소명의식을 투사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원했고 그런 방식으로 정치의 주체로 서게 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예전에 명계남 씨가 노사모에 대해 쓴 글의 일부를 옮겨 보았습니다. 노사모는 아니지만(그런데 왜 꼭 이렇게 밝혀야 하는지 참 답답하지만), 글을 약간 각색해 보면,
"내가 노무현을 통해 내 자신의 정치적인 바람과 역사적인 소명의식을 투사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원했고, 그런 방식으로 정치의 주체로 서게 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저에게 우리 정치를 보는 시각을 교정해 주었습니다. 또 열정과 기대와 희망을 안겨주었지만 재임 중 회한과 후회와 실망도 더불어 안겨 주었던 사람입니다. 돌이켜 보니, 그와 함께 했던 지난 시기는 정말 치열하게 살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아쉬움은 없습니다. 정말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았던 분으로 기억하겠습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 구조겠지요. 그런 것을 아시기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은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그러나 인간 노무현, 2002년 이전의 노무현은 제 기억에 영원히 남겨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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